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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인권> 읽기 (재창간 이후)/제8호(재창간호) (2010)

편집장의 말 ; 不義와 無能으로 문학에 빚지지 않는 법학을 지향하며 / 송영훈

 

8호 편집장의 말.pdf

 

不義와 無能으로 문학에 빚지지 않는 법학을 지향하며

송 영 훈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편집간사

<공익과 인권> 재창간호의 원고가 더디 모여가던 어느 여름날, 원고 대신 법정소설 한 권을 손에 잡았다. 문고판의 값싸 보이는 표지에는 ‘소수의견’이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특집 논문의 초고를 읽다가 머리를 식히기 위해 소설을 펴든 것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 세 시간 후 전신에는 무력감이 퍼졌다. 페이퍼백의 손바닥만한 소설 한 권이 수많은 참고 논문들과 법령, 판례를 인용하여 써내려간 논문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도 입체적인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은 ‘용산’이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으면서도 용산참사를 초래한 법현실의 문제점과 그 책임소재를 분명히 지적하고 있었다. ‘세상에 꼭 필요한 글이라 하더라도 너 아니면 쓸 사람이 없는 경우에만 쓰라’는 몽테뉴의 말이 있던가. 그 말대로라면 소설 ‘소수의견’의 존재를 안 순간 우리의 ‘소수의견’은 굳이 책으로 펴낼 필요를 찾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면 법학이 문학에 빚진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법학이 문학의 상상력을 앞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법이 사람을 ‘사람’으로 알지 못하던 시절부터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먼저 꿈꾼 것은 문학이었다. 법이 한껏 근엄한 얼굴로 없는 것을 있다고 하고 같은 것을 다르다고 할 때 일종의 反기억(counter-memory)을 구축하면서 그것을 전복시킨 것도 문학이 먼저였다. 법은 그런 문학을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 뒤에야 따라왔고 그 한복판에는 문제의식 없이 현상(status quo)을 추종한 결과 무지(無知)의 세계에 갇힌 나태한 법학이 있었다. 하여 소설은 뼈아프게도 일갈한다. “정의의 진짜 적은 불의가 아니라 무지와 무능이다. 역사를 통틀어 그래 왔다.”[각주:1]

이 책을 펴내는 이유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법이 문학과의 시차를 수십 년으로 갓 좁힌 시절의 선배 법학도들은 오로지 정의감으로 충만했다. 그들 중 일부는 거리로 나갔다. 그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법과 문학의 시차가 수십 년에서 다시 십수 년으로 좁혀지자 그 일부의 ‘일부’는 의사당으로 갔으나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아무리 시차가 좁혀져도 법이 여전히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는 자리에 위치한 당사자에게는 법이란 곧 지옥이다. 그 와중에서 원인을 찾지 못하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법학이란 결국 地獄道의 방조자에 지나지 않는 존재이다.

이 책을 만든 이들이 ‘법학은 논증의 학문’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은 이러한 연유에 있다. 그러한 정체성에 충실하고자 했다는 것이지 충실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이 책이 지향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방향과 목소리만을 앞세우지 않고 치밀하게 논거와 논리를 구축해 나감으로써 적어도 각자의 법학적 관심 영역에서만큼은 無知와 無能으로 ‘정의의 적’이 되지 않고자 한 노력의 흔적이 이 책에 투영되어 있다.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1년 반이 넘게 지난 시점에서 뒤늦게, 그것도 한참 에둘러 가는 것처럼 보이는 권리금 문제에 대한 연구가 그 대표격이다. 소설의 신랄함은 통쾌하되 책장을 덮고 나면 달라진 것이 없는,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지옥과도 같은 법현실이 변화하는 데는 소수의견이 합리성을 인정받아 다수의견으로 전화(轉化)하는 학문적 숙성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두 번째 특집의 주제인 장애인 인권운동은 그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이다. 학생인 필자들이 그러한 숙성 과정을 주도할 수는 없겠으나 용산참사와 장애인 인권 문제뿐만 아니라 버마의 인권 상황, 의약품 부작용 피해자의 보호, 대만의 사형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논문의 필자와 역자, 그리고 편집위원들은 적어도 그 과정을 위한 단초를 가장 적극적으로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동시에 이 책에 관여한 이들 모두는 무지와 무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법률가의 우(愚)’에 빠지는 것 또한 피하고자 했다. 무지와 무능이 정의의 ‘진짜 적’일지는 몰라도 ‘유일한 적’인 것은 아니다. 不義는 그 자체로 정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을 만들면서는 오직 논리에 정합하여야 한다는 데에만 집착하여 그 ‘논리’가 어디서 온 것인지 살피지 않고 형식논리만을 따지면서 결과적으로 처음의 좌표를 잃고 자기도 모르게 不義의 ‘논리’를 답습하지 않고자 하였다. 그 때문에 과할 정도의 토론도 있었다. 그 모든 과정을 거쳐, 학생들의 힘으로 만든 첫 호를 감히 내놓는다. 활자화된 기록이 만들어지는 순간 말과 글로만 ‘공익’과 ‘인권’을 희롱하지 않는 삶의 태도를 지켜나가야 할 과제가 이 책을 만든 이들에게 부여되었다.

끝으로 이번 호 ‘편집장의 말’에 부여된 특유한 의무를 불성실하게 이행하면서 맺고자 한다. 종류를 막론하고 정기간행물 첫 호의 편집장들은 처음 펴내는 책이 앞으로 오래도록 융성하기를 바라는 뜻을 밝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 <공익과 인권>이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갖게 된다거나 ‘지구상에서 사라지지 않는(shall not perish from the earth)’다거나 하는 것은 <공익과 인권>을 재탄생시킨 이들의 희망사항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는 마치 변제(辨濟)로 제 역할을 다하고 소멸하는 채권처럼 이 책도 하루빨리 그 임무를 다하고 종간(終刊)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인권은 하나의 점근선(漸近線)과 같은 것이어서 누구나 자신의 정당한 목소리가 법 앞에서 외면받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이 책을 한두 권 내는 것만으로 쉬이 오지는 않을 것임 또한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다만 그 때까지는 <공익과 인권>이 ‘마땅히 다수의견이 되어야 할’ 소수의견들의 공론장으로 기능하면서 법과 사회가 점근(漸近)해야 할 지점을 분명히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이 땅의 법률가・법학자・법학도들이 不義와 無能으로 문학에 지는 빚을 조금이나마 줄여가는 역할을 해나가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1. 손아람, 소수의견 (들녘, 2010), 383.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