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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인권> 읽기 (재창간 이후)/제15호 (2015)

편집장의 말 / 노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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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말>

 

노종화

<공익과 인권> 15호 편집장

 

 

 

 

다시 한 번 공익과 인권을 말합니다.


당신이 누구든 어디에 있든 인권을 가지고 누릴 자격이 있고,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 이제는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공익과 인권을 굳이 또다시 말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 주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공익과 인권이라는 가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만큼 현실에서 온전히 실현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차가운 주검으로 해변에 떠내려 온 세 살짜리 시리아 아이의 사진이 많은 이들을 가슴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난민을 신청한 7백여 명의 시리아 사람 중에서 난민 지위를 인정받은 사람은 고작 3명에 불과합니다. 난민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고용정보원에 따르면 2015년 상반기 현재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에서 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는 약 21만 명에 달하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채용되지 못한 숫자까지 포함된 출입국·외국인정책본부의 통계에 따르면 약 57만여 명이 취업을 목적으로 한국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소수의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한 대부분은 농축산업과 같이 더 이상 국내 노동자만으로 노동수요를 채울 수 없는 직종에서, 열악한 노동환경과 각종 차별을 감내하며 우리 경제의 밑바닥을 떠받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조사한 국제엠네스티는 농업분야의 외국인 노동자들을 두고 착취를 목적으로 한 속임수를 통해 채용되었다는 점에서 인신매매되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취재 논문> 권민지 외, “2015 농축산업 이주노동자 근로환경 관련 법제 연구”).

한편, 모두가 동일한 성적 지향이나 정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제는 사회 전반에 잘 알려진 것 같지만, 여전히 이 땅의 성소수자는 갖가지 차별과 위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최근 연방대법원 판결을 통해 변화를 이끌어낸 미국을 비롯해 여러 국가들이 동성결합까지도 제도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우리는 차별을 금지한다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선언적인 인권헌장조차 반대에 밀려 통과시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서울시의 한 구청은 성소수자 문화행사가 청소년에게 유해하고, “주민화합에 지장을 초래하고 주민갈등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성소수자 단체의 시설이용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성소수자에 대한 인권보장은커녕 그들의 문제가 이야기될 수 있는 자리마저 온전히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인권위 결정 회고> 정기하, “동성애와 동성결혼이 이야기되는 자리를 바라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유지하고 국민주권을 실현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로 눈을 돌려봅니다. 헌법재판소는 집회의 자유개인의 인격발현의 요소이자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요소라는 이중적 헌법적 기능을 한다면서 그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합법적인 집회·시위조차 경찰에 의한 과잉채증으로 인해 자유롭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찰은 채증의 근거나 방식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 없이 불과 3m 이내의 근거리에서참가자들의 인상착의를 촬영함으로써 집회의 자유와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을 침해하고 있습니다. 반면, 채증정보가 경찰에 의해 현재 어떻게 관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정보가 제시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참가자들은 혹시나 채증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블랙리스트가 있어서 “‘위험인물로 감시되지는 않을지두려워해야 하는 형편입니다(<일반 논문> 김구열 외, “집회 현장에서의 경찰 채증활동에 대한 기본권적 문제제기”).

많은 이들을 힘들게 했던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이야기도 해보겠습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노란 리본을 참 많이 봐왔습니다. 모두가 같은 색깔의 비슷한 리본을 달았지만, 거기에는 추모하는 마음부터, 국민의 기본적인 안전조차 제대로 지키지 못한 눈 먼 국가에 대한 분노, 그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참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소망하는 바람까지 다양한 생각이 담겼습니다. 이렇게 노란 리본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최소한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육부가 리본 달기가 교육활동과 무관하고 정치적 활동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학교 내에서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라는 공문을 학교현장에 보냈습니다. 이러한 교육부의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아연실색했지만, 동시에 권력기관이 가진 표현의 자유에 대한 의식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인권위 결정 회고> 노종화, “노란 리본을 달 수 있는 표현의 자유”).

다른 한편으로는 혐오표현이 인터넷 공간 등을 통해 확산되면서, 과연 표현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민주화를 비하하는 용례로 쓰고, 가족의 노출사진을 게시판에 올려서 인증을 하고, 여성에 대한 혐오발언을 서슴지 않는 일베가 그저 극단적이고 몰지각한 소수의 비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라, 병들어 있는 우리 사회의 깊숙한 내면을 속살 그대로 보여주는 현상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가까운 일본에서도 재일조선인을 상대로 한 혐오발언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되었고, 학계를 중심으로 혐오표현 규제의 정당화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고 있습니다(<번역논문> 고타니 준코, 송지은백원우 옮김, “표현의 자유의 한계”).

이처럼 모두가 마땅히 가지고 누려야 할 기본적 인권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보편적 권리라는 추상적인 층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높은 수준의 사회적 합의와 달리, 실제로 인권이 보장되고 작동해야 할 현장에서는 인권의 문제를 파악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의 충돌이나 정치적 논쟁으로 인해 인권 침해는 너무 쉽게 방기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인권에 관한 논의가 수면 위로 올라오지조차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누군가는 위와 같은 문제는 결국 정치로 풀어야 하지 인권과 같은 당위적 가치를 내세워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자원을 배분하거나 제도를 마련하는 등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정치로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공익과 인권에 대한 고민과 지향 없이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다수를 설득해나갈 수도 없습니다. 최근 세월호 추모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구속된 박래군 인권활동가로 인해 부각된 피의자 메모권 문제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범죄혐의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수사기관이 자의적으로 피의자가 메모를 할 수 없게끔 해온 관행을 없애기 위해서는 피의자 역시 가장 기본적인 인권을 가진다는 인식이 선행되어야 합니다(<인권위 결정 회고> 김지수, “조사 중 피의자의 메모행위와 피의자 방어권 보장”).

 

그렇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공익과 인권을 말하고자 합니다.

 

편집과정이 마무리에 접어들 무렵,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활동하고 있는 황필규 변호사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강연에서 황필규 변호사는 인권의 범주에 한계는 없다. 인권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부터 스스로 정한 한계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항상 인권의 당사자인 사람을 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공익과 인권󰡕 역시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5󰡔공익과 인권󰡕도 기존의 범주나 해석에서 과감히 벗어나서 당사자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서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들 중 누가 대표자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누가 그러한 자격이 없는지는 국가 및 사회공동체가 해당 구성원을 대하는 태도와 시각을 여실히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피선거권 관련 논의는 상대적으로 취약했던 게 사실입니다. 특히 대통령 피선거권 연령 규정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피선거권이라는 기본권을 온전히 실현하기 위해서는 왜 ‘40세 이상의 국민에게만 대통령 피선거권을 인정하고, ‘25세 이상의 국민에게만 국회의원 피선거권을 인정하는지에 대해서 명백히 해명해야 하며, 나아가 이러한 규정의 위헌성을 면밀히 검토할 필요성이 있습니다(<일반 논문> 김덕현, “공직선거법상 연령에 의한 공무담임권 제한의 위헌성 검토”).

한편, 환경문제는 인권의 문제라기보다는 환경이라는 별도의 영역에서 논의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대부분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소수인종과 빈곤한 지역사회만이 환경오염에 과도히 노출되어 왔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한 환경인종(차별)주의(environmental racism)’에 따르면, “인종과 소득,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차별 없이 동등할 것을 요구하는 환경정의(environmental justice)’는 반드시 인권의 언어와 문법으로 설명되어야 합니다(<취재 논문> 김홍철, “김포 비도시 계획관리 지역의 환경부정의 사례와 해소방안”).

공익과 인권을 접근하는 방법론 역시 특정한 범주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존의 법학 방법론에 갇혀있기보다는, 필요하다면 통계적인 분석방법을 동원함으로써 유해물질로 인한 인과관계 등을 보다 명확히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법이 과학에 폐쇄적이거나 혹은 무지하여 피해자의 권리구제에 사각지대가 발생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일반 논문> 박도현·유병수, “통계학적 관점에서 본 집단적 유해물질 사건에서의 인과관계 법리에 관한 연구”).

 

당사자인 사람의 입장에서 공익과 인권을 말하고자 합니다.

부당해고 피해자의 입장에서 체당금이 갖는 의미와 그 중요성을 인식한다면, 지체 없는 권리구제를 염두에 두고 임금상당액금전보상금등을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일반 논문> 김종현, “부당해고 피해자의 임금채권 보장”). 한편, 지속적인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정신보건시설에서 입소자에 대한 성희롱과 폭행, 강제노동이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조용히일어나고 반복되는 이유는, 이 문제를 인권 침해를 겪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다 민감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인권위 결정 회고> 김덕현, “반복되는 정신보건시설 인권침해, 무너지는 자유·안전·자기결정권”).

사실상 사문화된 규정인 형법상 낙태죄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합헌결정 역시 낙태와 가장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여성을 보다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낙태를 범죄화 하는 것은 자신의 신체에 대한 통제권, 삶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결정권, 위협을 받지 않고 안전한 삶을 영위할 권리 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결과까지 가져올 수 있지만, 헌법재판소의 판단 과정에서 이러한 점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습니다(<일반 논문> 이연우, “낙태죄 범죄화와 여성 섹슈얼리티 통제”).

이제는 단순히 투표권 행사를 넘어서, 선거정보에 대한 접근권이 선거권의 핵심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각자료를 이해하는 데 제한이 있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선거정보접근권을 보다 더 세심하게 보장해야만 차별 없는 선거권 보장이 실현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가 점자형 선거공보 규정에 대해 합헌결정을 도출하면서, 시각장애를 가진 당사자의 입장을 충분히 살폈는지는 의문입니다. 나아가 현행 규정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시각장애인의 선거정보접근권을 보장할 국가의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기 위해서는 시각장애인이 처한 여건과 여러 제약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일반 논문> 양소연 외, “점자형 선거공보 규정을 통해 본 시각장애선거인의 선거정보접근권 보장 문제”).

 

그래서 다시 한 번, 공익과 인권을 말합니다.

공익과 인권이라는 가치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발화되는 만큼, 현실에서도 다양한 위치에서 약자의 지위에 처한 사람들이 마음껏 공익과 인권을 추구하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개인의 삶과 우리 사회 모두를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