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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인권> 읽기 (재창간 이후)/제17호 (2017)

편집장의 말 / 남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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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의 말>


남수진

<공익과 인권> 제17호 편집장


    올해 추석은 유난히 길었습니다. 인천공항의 최다여객 기록이 갱신되었다는 뉴스가 연휴 내내 보도되었지요. 그리고 추석 당일, 한 명의 반도체 직업병 피해자가 또 눈을 감았습니다. 벌써 80번째 사망자입니다. 근무 후 얻은 ‘전신성 경화증’에 대한 산재 인정을 받지 못한 채였습니다.

    작년 이맘때, 분노로 광장에 모인 시민들의 연대가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역사를 이뤄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권강국을 표방하는 2017년의 대한민국에 서게 되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유엔 자유권・사회권 규약 등을 굳이 들춰내지 않아도, 이미 인권은 오늘날 전지구적인 규범과 제도로 자리 잡은 듯 보입니다. 이렇게 희망이 부풀다가도, 여전히 들려오는 비보에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인권 오디세이』를 저술하신 성공회대의 조효제 교수님께서는, 알면 알수록 어렵고 답이 없어 보이는 것이 인권 문제라고 하셨습니다. 이 답 없는 문제에 ‘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삶을 남몰래 흠모’(심보선, ‘청춘’)하고만 싶을 때도 많았습니다. 무수한 정념에 사로잡혀, 종종 타인을 잊곤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데, 같이 눈물 흘리기보다 본성에 따르는 양 살며시 눈을 감아버리고 싶기도 합니다.

    제 눈 가리고 아웅하려는 3살 아이와 같은 저에게, <공익과 인권>은 매우 불편했습니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아픔들을 굳이 갈고 파헤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당연한 것들을 얻는 데조차 지리한 투쟁을 요구받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니(신영복,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더 많은 사람들과 이 불편함을 나누고 당면한 문제를 이야기하고자 올해도 <공익과 인권> 제17호를 펴냅니다.


    예년과 마찬가지로 이번 호에서도 인권법학회 내 소모임들의 노고가 빛을 발합니다. 기본권연구모임의 공직선거법상 사전선거운동 규제에 관한 연구와 군 내 자살자에 대한 국가배상에서의 과실상계를 검토한 군인권소모임 소리의 글은 매주 세미나에서 쌓아 온 논의를 빚어낸 결실입니다.

    국공립학교 경비노동자(박지아), 학습지교사・골프장 캐디 등의 특수형태근로종사자(배지연), 그리고 가사노동자(전효빈)에 관한 세 편의 글은, 그간 법제도의 외곽에 방치되었던 우리 주위의 평범한 노동들을 재평가하고 법적・사회적 보호를 당면 과제로 제시합니다. 더불어 한가람, 김강님의 글은 각기 헌법재판소와 서울서부지법의 결정을 중심으로, 동성애에 관한 우리 사회의 정체된 시각을 그대로 수용한 법원의 결정을 비판하며 시대의 변모에 맞는 적절하고 새로운 판단을 요구합니다. 미셸 알렉산더의 강연에 대한 번역문(김상오 외)은, 엄벌주의 형사사법의 도입이 우리나라에 가져올 소수자 차별의 문제를 미국 형사절차 속 인종차별 문제를 통해 내다보고 있습니다. 동등한 주체는커녕, 정복과 욕망의 대상으로서 여성의 이미지가 소비되어 왔던 게임 속 공간을 연구함으로써, 여성게이머들을 향한 발화와 그 속에 내재된 차별적 구조를 지적하는 글(범유경 외)도 매우 흥미롭습니다.

    이외에도 올해는 특히 더 새로운 화두를 던져주는 글들을 싣고자 노력했습니다. 그 덕분에 <공익과 인권>에서 주로 다뤄왔던 주제를 넘어, 사회적경제 생태계를 위한 법체계의 고안(이경호 외), 동물권 보장을 위한 동물보호법의 개정(이준용), 환경권과 환경 공익 실현을 위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의 검토(박형근 외), 성소수자 가출청소년의 제도적 지원 체계에 대한 연구(김시은) 등의 독창적인 글들을 이번 호에 실을 수 있었습니다. 이 글들이 공익과 인권의 개념을 확장시키고, 생각의 지평을 한 층 더 넓힐 것이라 자평합니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정권의 아이히만이 유대인 학살의 주범이 되어버린 그 원인으로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를 언급합니다. 저자들의 해석이 각 고의 논증을 통해 드러나는 순간 숙고를 불러일으키고, 그것이 열렬한 호응이건 차디찬 비판이건 공익과 인권의 가치를 모두가 인식하는데 중요한 촉매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평범함 속에 매몰되던 일상에, <공익과 인권>이 앞으로도 사유의 불능성을 극복하고 ‘사람이기에 모두가 누려 마땅한 것’들에 대해 계속 이야기하게끔 하는 공간으로 남기를 소망합니다.

    제17호를 발간함에 있어 무엇보다, 깊은 고민을 나눠 준 저자 분들을 비롯하여 법학전문대학원에서의 바쁜 시간을 할애해 편집 작업을 함께 한 제17호 편집위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발간에 있어 귀한 의견 내어주신 양현아 교수님과 <공익과 인권>의 전 편집장이신 노종화, 이종준 선배님, 사단법인 두루의 최초록 변호사님의 노고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덧붙여, 매년 <공익과 인권> 발간을 성심껏 지원해주고 계신 서울대 공익인권법센터의 김영중 박사님, 도서출판 온샘의 신학태 선생님께도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이 외에도 제17호의 출간을 돕고 격려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공익과 인권>의 표어를 써주신 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을 되짚으며 <공익과 인권> 제17호를 내어놓습니다. ‘사람은 다른 가치의 하위개념이 아닙니다. 사람이 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