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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인권> 읽기 (재창간 이후)/제18호(2018)

발간사 / 배지연, 전효빈

18_00_배지연,전효빈_발간사.pdf

 

법과 진실


배지연・전효빈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인권법학회 학회장

 

  어느 날, 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처음 체포된 날, 그는 감시원에게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감시원은 “그것은 잘 모르지만, 법을 집행할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원을 찾아가자 판사는 말합니다. 이미 재판 시간이 지났다고, 당신은 한 시간 전에 왔어야 했다고. 변호사를 찾아가자, 그는 말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말을 해주어야 한다고. 그리고 어느 날, 한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카프카의 이 오래된 이야기는 말합니다. - 네가 누구건, 무엇이 진실이건,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고, 중요한 것은 네가 유죄라는 것뿐이라고. 이 이야기가 절망적인 이유는, 기소되는 순간 유죄가 확정되어 있는, 진실마저 무력한 세계에서 우리가 타인을 설득하고 함께 살아갈 방법은 무엇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법에 따라서 하셔야죠.” “우리가 지금 법을 믿을 수 있는 상황입니까?”


  지난 5월 29일, 대법원장과의 면담을 요청하면서 대법정에 뛰어드는 해고된 KTX 승무원들의 앞을 법정 경위들이 막자, 해고된 이들이 외친 말입니다. 저 말 앞에, 법을 공부하는 우리는 문득 망연해지고야 맙니다. 논리와 경험칙에 기한 판단이라는 말은 때로는 민망할 정도로 추상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법을 공부하는 것은, 공정한 재판과 사법권의 독립, 그리고 그것을 위해 수많은 법관들이 쏟아온 노력과 변호사들이 벼려온 논리 속에서 결국은 진실이 발견되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법원행정처의 ‘국제인권법연구회’에 대한 견제 논란에서 시작된 불씨는 사법부 전반을 휘감았고, “원활한 국정운영”, “노동개혁에 기여할 수 있는 판결”의 목록에 KTX 해고 승무원의 근로자 지위 판결, 쌍용차 정리해고 판결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법이 진실이 아니라 다른 것을 향하고 있었다는 정황들이 속속 발견되었고, 사람들은 법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법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고 있는 이때, 여전히 법은 인간과 진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하기 위해 <공익과 인권>은 올해에도, 열여덟 번째 책을 세상에 내어놓습니다.


  원고의 모집과 선정, 저자와의 소통,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편집, 교열의 과정 속에서도, 사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세상과 법에 대한 냉소와 무력감에 빠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독 사회적 약자에 대한 혐오가 짙고 깊었던 한 해 속에서 산업재해 노동자와 트랜스젠더, 역사의 희생자들과 난민 등에 대한 시대의 고민을 담고자 했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아픔을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법률가들이, 활동가들이, 연구자들이 각자의 공간에서 어떻게 기존의 언어를 깨뜨릴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했습니다. 토론과 논쟁이 인간의 권리를 확장시켜온 역사와 그 역사의 흔적이 묻어있는 법리를 발견하였습니다.


  여름내 땀 흘려 <공익과 인권>을 펴내며, 우리의 원동력은 이러한 사유들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삶의 진실이 발견되리라는 희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책을 세상에 내놓으며 돌이켜보건대 어쩌면 희망이 있기 때문에 법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치를 믿는 사람들의 존재 자체가 희망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억압받는 이들의 고통에 절망하지 않고, 추상화된 이성과 법리 속에 매몰되지도 않고, 세계에 발을 딛고 서서 서로를 붙잡아주는 힘이 되어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올해에도 <공익과 인권>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