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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익과 인권> 읽기 (재창간 이후)/제18호(2018)

한국 사법부의 판결 회피에 대한 법철학적 분석 / 최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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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법부의 판결 회피에 대한 법철학적 분석

: 각하 판결 및 판결 지연 사례를 중심으로

 

최효재

 

국문초록

 

  흔히 사법부는 담당하게 된 사건의 결론을 내는 것을 회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본질적 소극성을 갖는다고 평가된다. 그러나 사법부가 실제로 기능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사법부는 스스로 원하는 최선의 선택을 최적의 시기에 내리기 위한 역동성을 드러낸다. 사법부는 본안판단을 하기 곤란한 사안에 관하여 당해 사건의 절차적 이유를 들어 각하 판결을 내리기도 하고, 부담이 없어질 때까지 종국판결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본고는 실제 사법부의 각하 판결과 판결 지연 사례를 분석하고 그 법철학적 함의를 밝힘으로써 사법부의 적극성을 탐구하고 그 새로운 가능성을 열고자 한다.

  사법부의 대표적인 각하 판결 사례로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선거 무효소송, 월성원전 1호기 수명연장처분 무효소송, 집회시위 관리를 위한 경찰의 물포사용행위 위헌확인 헌법소원이 있다. 사법부는 이들 소송에 대하여 본안판단을 할 여지가 있었음에도 당해 소송의 절차적 요건을 엄격하게 해석하여 각하 판결을 하였다. 이들 소송은 국가공권력 행사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제기된 것이었으나, 사법부는 이른바 민감한결정을 하지 않고 회피한 것이다. 사법부의 대표적인 판결 지연 사례로는 대한민국 제18대 대통령선거 무효소송, 양심적 병역거부 불인정 헌법소원 및 위헌법률심판, 삼성X파일 사건 관련 노회찬 전 의원 형사소송이 있다. 통상의 소송사건 처리 속도와 비교할 때, 사법부는 이들 소송 관련 심리변론증거조사 등 제 절차를 수년간 지연하였고, 그 결과 종국판결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간을 소요하거나 심지어는 종국판결을 내리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 소송은 정치사회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에 관한 것이었기에, 사법부는 판결을 지연함으로써 사법부의 결정이 불러올 파장을 최소화하여 사법부가 지게 될 부담을 회피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법부는 각하 판결과 판결 지연, 즉 의도적인 부작위를 통하여 스스로 운신의 폭을 넓히고 있다. 사법부가 판결을 회피하는 일련의 과정은 대내적 사법적극주의의 일부로서의 역동성으로 포섭될 수 있다. 법철학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켈젠식 법실증주의는 이렇게 재정의된 사법적극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켈젠은 법을 절대적인 명제로 보고 판결도 절대적인 법의 한 형태로 보지만, 실제 사법부는 판결 내용은 물론 판결 절차에서도 본안판단을 하지 않거나 지연시킴으로써 사법부가 원하는 가치판단을 하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사법부 고유의 가치판단을 긍정한다는 점에서 드워킨식 비실증주의는 사법적극주의를 보다 잘 설명한다. 하지만 드워킨 역시 정답 테제를 통해 다양한 가치판단의 근저에는 특정한 법원리가 있음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지닌다. 드워킨의 정답 테제와 달리, 법관은 법질서에 내재한 원리를 스스로 구성하고 나아가 이를 현실적합성 있는 판결 구성의 근거로 활용함으로써 정답을 발명할 수 있다. 따라서 드워킨의 체계도 이 지점을 보완하여야 한다.

  이상과 같이 재정의된 사법적극주의에서 법과 정치의 상호작용은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나고 그래서 더 큰 중요성을 갖는다. 사법부가 건강한 적극성을 유지하려면 법과 정치가 균등한 행위자로서 진정한 상호작용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하는바, 사법적극주의의 목표는 역설적으로 사법부의 영향력을 능동적으로 절제하는 데 두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사법부의 대내적 역동성은 대외적 사법적극주의로 확장되어 모든 사람의 기본권 증진에 기여할 수 있다.

 

주제어 : 판결 회피, 각하 판결, 판결 지연, 사법적극주의, 한스 켈젠, 로널드 드워킨, 부작위, 기본권, 법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