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의 조건
이종준
『공익과 인권』 제16호 편집장
저는 학교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합창단 이름은 SPERO SPERA입니다. “나는 희망한다. 그러니 당신도 희망하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 내가 희망한다는 사실에 누군가는 희망할 힘을 얻을 수 있겠지. 그런데 나는 언제, 어떻게 하면 희망할 수 있는가? 그저 희망하면 되는 것인가?’ 저는 스스로에게 희망의 조건을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희망하는 데에도 조건이 필요할까요? 누군가는 희망은 의지의 문제이므로 희망에는 조건이 없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면 된다’의 정신이 희망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할지 모릅니다. 저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희망에도 조건이 있다고 봅니다.
생각이 바뀐 것은 한 컷의 만화 때문이었습니다. ‘시리아 어린이가 선택할 수 있는 것(Choices for Syrian Children)’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풍자만화에는 두 명의 어린이가 나옵니다. 오른편에는 지난해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기가, 왼편에는 며칠 전 시리아 내전의 격전지에서 온몸이 먼지와 피로 뒤덮인 채 구출된 다섯 살 아이 옴란이 그려져 있습니다. 저는 이 만화를 보기 전에 신문에서 옴란의 사진을 직접 보았는데요, 피투성이 얼굴보다도 그 얼굴에 얹힌 무표정이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울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이 그림을 보고 나서 저는 희망에는 ‘가능성’이라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믿게 됐습니다. 옴란의 무표정은 절망, 즉 희망이 끊어진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아이가 희망을 품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엉엉 울기라도 하기 위해서는, 울면 누군가 와서 도와줄 것이라는 가능성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옴란에게는 그런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또 작가는 그림을 통해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리아 어린이에게는 선택지가 이 둘밖에는 없다.” 우리가 희망이라는 것을 논하기 위해서는, ‘세 살 아기의 죽음’과 ‘다섯 살 아이의 무표정’ 외에 다른 선택지가 단 1%의 가능성이라도 품고 있어야 합니다.
희망하는 데에도 조건이 필요하다는 말은 어찌 보면 지나칠 정도로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Spero, Spera’라며 이상(理想)을 노래하는 사람만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쪼개려면 희망찬 의지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꽁꽁 얼리든 대포에 실어 쏘든,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책략이 필요합니다. 그런 뜻에서, 『공익과 인권』은 지금껏 가능성을 묻고 따져왔습니다. 사회의 음지에 시선을 모아, 어떠한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해서는 근본적, 구조적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가능성이 희미하게나마 있다고 여겨지는 영역에 대해서는 구체적, 정책적 대안을 제시하여 그 가능성이 현실화되기를 꿈꾸었습니다.
제16호 또한 이러한 흐름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은 질문 던지기에서 시작합니다. 이번 호는 독자에게 다음의 질문을 던집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의 주체가 ‘국민’에 국한되어야 합니까?” (대한민국 체류 난민의 취업 실태 연구) “선례를 찾을 수 없는 노동 문제가 자꾸만 늘어나는 가운데, 노동법은 어떻게 해석되고 활용되어야 합니까?” (노동법에게 인권을 묻다) “판결문에서 드러나는 여성에 대한 법관의 시각에는 문제가 없습니까?”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여성이란 무엇인가) “지금껏 성폭력 관련법을 해석해온 방식은 진정 객관적 ‧ 중립적이었습니까?” (한국 성폭력 관련법에 담긴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젊은 층의 섹슈얼리티 비교 연구) “법에게까지도 외면당했던 ‘기지촌 여성’들은 지금껏 어떻게 목소리를 내왔습니까?” (‘기지촌 여성’에 대한 입법·사법운동과 법적 주체 생산) “최근 도입된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은 어떻게 해야 진정 장애인의 권익을 옹호할 수 있을까요?” (한국형 장애인권익옹호기관의 바람직한 운영 방안)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진술의 신빙성이 의심받는 게 과연 정당합니까?” (당신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한편 『공익과 인권』 편집위원회는 지난 1년간 나온 국가인권위원회 결정 가운데 네 개를 골라, 권력 행사의 주체(정신보건시설, 장애인거주시설, 경찰)와 대상(장애인, 정신질환자, 피의자, 국민) 사이에 끼어들기 쉬운 부당함을 예리하게 지적하고자 했습니다.
독자 여러분에 의해 이 질문들이 자꾸만 허공으로 퍼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허공에 떠 있는 수많은 견해들과 기꺼이 충돌하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질문 자체는 소멸되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균열을 일으키기를 바랍니다. 그 균열된 틈에서 어떤 가능성이, 다시 말해 희망의 싹이 움트기를 바랍니다.
'<공익과 인권> 읽기 (재창간 이후) > 제16호(2016)'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이 보호하고자 하는 여성이란 무엇인가 / 박규회 (0) | 2018.01.09 |
---|---|
노동법에게 인권을 묻다 / 류문호 (0) | 2018.01.09 |
대한민국 체류 난민의 취업 실태 연구 / 김시정・김지은・신주영・이병호・전효빈・최보경 (0) | 2018.01.09 |
발간사 / 김이안 ・ 유현정 (0) | 2018.01.09 |
격려사 / 조국 (0) | 2018.01.09 |